우키미도의 동물들: 전시 일본의 동물원 맹수 처분

역사

우키미도의 동물들: 전시 일본의 동물원 맹수 처분

1943년 8월부터 일본 정부는 전국 동물원에 사자, 호랑이, 곰, 코끼리를 죽이게 했습니다. 후쿠오카 오호리 공원에 서 있는 붉은 정자는 그런 동물원 하나가 남긴 몇 안 되는 유물입니다.

동물원에서 온 정자

오호리 공원의 섬에 서 있는 육각형의 붉은 정자 '우키미도(浮見堂)'는 원래 공원을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후쿠오카 최초의 동물원에 있던 바다사자·물개 연못을 위해 지어진 건물입니다. 오호리 공원 공식 사이트에 따르면 히가시 공원에 있던 동물원의 물개 연못 위에 서 있었고, 1949년에 오호리로 옮겨졌습니다. 후쿠오카시 문화재 안내 책자는 바다표범 같은 바다 동물을 구경하기 위한 건물이었으며, 보존을 위해 옮겨 지어졌고 2014년에 시 문화재로 등록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동물원의 역사는 고작 10년 9개월이었습니다. 후쿠오카시는 시민들의 기부금을 큰 밑천으로 삼아 1933년에 동물원을 열었고, 1944년 5월 20일에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6월 6일, 사자와 호랑이, 하마가 처분되었습니다.

이것은 후쿠오카만의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거의 알려지지 않은 국가 정책의 일부였고, 영어로 이 주제만을 다룬 책은 이토 마유미의 『Japanese Wartime Zoo Policy: The Silent Victims of World War II』(2010)뿐입니다. 이 글은 그녀의 연구를 따라, 누가 명령을 내렸는지, 왜 그랬는지, 동물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사육사와 아이들이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후쿠오카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처분 과정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으니 유의해 주세요.

명령

이 일을 구상한 사람은 초대 도쿄도 장관 오다치 시게오 한 사람이었고, 명령은 내무성을 통해 전국 동물원에 전달되었습니다. 이토는 연구자와 동물원장, 동물원 전문가들의 의견이 이 점에서 일치한다고 씁니다.

오다치는 도쿄제국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내무성 출신의 직업 관료였습니다. 1939~40년에 내무차관을 지냈고, 1942년에는 싱가포르(쇼난으로 개칭)의 시장 겸 육군 군정관이 되었습니다. 1943년 7월, 전쟁 수행을 위해 도쿄시와 도쿄부가 통합되어 도쿄도가 생기자 그는 초대 장관이 되었습니다. 이듬해에는 그 자신이 내무대신이 됩니다.

내무성은 지방 행정과 경찰을 맡았고, 전쟁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들을 검거하는 특별고등경찰도 그 안에 있었습니다. 동물원장은 공원과장에게, 공원과장은 내무 관료에게 보고했습니다. 이토는 이런 지휘 계통에서는 누구도 자리나 그 이상을 잃을 각오 없이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1940년 군용 동물 위령제에서의 하나코

이미 있던 계획

1941년 8월, 육군 동부군 수의부는 우에노 동물원에 공습 시 비상조치 계획을 요구했습니다. 원장 대리 후쿠다 사부로가 작성한 '동물원 비상처치 요강'은 동물을 위험도에 따라 네 등급으로 나누었습니다. 제1류에는 곰, 호랑이, 표범, 사자, 하마, 아메리카들소, 아시아코끼리 등이, 제2류에는 물개와 바다사자가 들어 있었습니다. 공습이 임박하면 위험한 동물을 질산스트리크닌이나 청산가리로 독살하고, 독이 듣지 않으면 총살한다고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공습이 벌어지는 와중에 실행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다치는 그것을 미리 실행하는 계획으로 바꾸었습니다.

1943년 8월 중순

언론인 다카미야 다헤이의 기록에 따르면, 1943년 8월 중순 오다치는 도쿄도 공원과장 이노시타 기요시를 불러 동물원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노시타는 공습 때 동물을 독살하고 필요하면 총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답했습니다. 오다치가 동물보다 사람이 먼저 다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이노시타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다카미야에 따르면 오다치의 대답은, 동물은 어차피 처분해야 하니 지금 '적당한 방법으로' 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습니다. 미리 알리면 군이나 경찰이 반대할지 모르니 알릴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고 합니다. 8월 16일, 이노시타는 후쿠다에게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위험한 동물을 한 달 안에 처분하라는 것이었습니다(후쿠다의 일지 다른 곳에는 8월 31일까지로 되어 있습니다). 극비로 하고, 인근 주민들이 총소리를 듣지 않도록 총이 아닌 독을 쓰라고 했습니다.

경시청은 나중에 아무도 자신들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고 불평했습니다.

군의 명령이었을까?

군이 명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토는 우에노 동물원 역사에 밝은 고모리 아쓰시의 견해를 따라, 처분 자체에 대해서는 '군의 명령'이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결정한 것은 내무성이었고, 군은 국내 방위에 관해서는 그 판단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다만 일부 동물원에서는 현지 부대가 실제로 압력을 가했습니다. 뒤에서 보듯이 교토와 구마모토에서는 마지막 명령을 내린 것이 육군 장교였습니다.

애국 의상을 입고 재주를 부리는 키코, 아돈, 엘도, 마카니(왼쪽부터). 히가시야마 동물원, 1938년 10월

왜 그랬을까

공식적인 이유는 시민의 안전이었지만, 이토는 진짜 목적이 시민들을 겁먹게 해 전쟁에 동원하는 데 있었다고 결론짓습니다. 겉으로 내세운 걱정은 폭탄에 우리가 부서져 사자와 호랑이가 거리로 풀려나는 것이었습니다.

공식적인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 까닭

  • 시기. 1944년 이전에 일본 본토가 받은 공습은 1942년 4월의 둘리틀 공습 한 번뿐이었습니다. 우에노 동물원이 동물을 처분한 것은 1943년 8월로, B-29의 도쿄 공습이 시작된 1944년 11월보다 15개월 이상 앞선 일이었습니다.
  • 다른 방법은 쉬웠다. 우리를 보강하거나, 방공호를 만들거나, 문을 닫거나, 동물을 지방으로 소개(疏開)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소개를 시도한 원장들도 있었지만, 우에노에서는 장관이 이를 거부했습니다.
  • 먹이 문제가 아니었다. 동물원은 먹이와 연료가 부족했지만, 이토는 내무성이 동물 복지에는 관심이 없었고 동물원은 먹이를 자급하려고 애쓰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 구출에 대한 반응. 후쿠다가 코끼리 톤키를 센다이로 보낼 준비를 하자 오다치는 격노했습니다. 이노시타에 따르면 오다치는 "죽이라고 했지, 살리라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연구자들이 보는 진짜 이유

이토가 인용하는 전문가들은 심리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며, 그녀는 이를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 전쟁을 실감시키기 위해. 군은 시민들에게 적기가 수도에 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실제 전쟁터를 본 오다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동물원에서 가장 유명한 동물들을 미리 죽이는 것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공습이 온다는 것을 믿게 하는 수단이었습니다.
  • 유언비어를 막기 위해. 당국은 공습을 당한 동물원에서 맹수가 탈출했다는 이야기를 적의 스파이가 퍼뜨려 혼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했습니다. 동물이 이미 죽었다면 그런 소문은 생길 수가 없습니다.
  • 감정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동물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심을, 처분을 '불가피하게 만든' 적에 대한 증오로 돌릴 수 있었습니다.

우에노 동물원장 고가 다다미치는 처분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고 썼습니다. 교토시 동물원의 수의사 다키자와는 그래서 동물을 조용히 굶겨 죽이지 않고 독과 총을 썼다고 주장했습니다. 굶겨 죽이면 충격이 작고, 동물원에 대한 항의를 부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자 이언 밀러는 지친 국민에게 충격을 주어 복종시키려는 의식화된 살육이었다고 말합니다.

이토는 자신의 추론도 덧붙입니다. 1941년 12월 15일, 조호르 술탄의 후계자는 폭격으로 우리가 열릴 것을 우려해 조호르 동물원의 육식동물 처분을 명령했습니다. 오다치가 싱가포르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두 달 뒤였고, 그녀는 이 일이 오다치에게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증거로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오다치는 명령에 관해 일기도 메모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동기는 가까운 사람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만든 공식 전기와 훗날 동물원 직원들의 증언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증언들이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옛 부하 요시타케 에이치는 선견지명과 수도 방위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고 했고, 이토 자신도 오다치가 도조 총리를 비롯한 육군 지도자들과 자주 충돌하며 가능한 한 나라를 지키려 했다는 점은 공정하게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명령의 이유가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씁니다.

그 이전의 동물원

처분에 앞선 몇 년 동안 정부는 동물원을 전쟁의 무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1937년부터 내무성은 우에노 동물원에서 군마·군견·군용 비둘기의 애국 전시회를 열고, 전사한 군용 동물의 위령제를 지냈습니다. 코끼리 톤키와 하나코는 야스쿠니 신사에서 전사자 유족 아이들을 위해 재주를 부렸고, 군마·군견 위령제에서는 제단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영어 이름은 금지되었습니다. 오사카의 침팬지 '로이드'는 '가쓰타'가 되었고, 교토의 코끼리 '카리야니'는 대동아공영권에서 따온 '도모에'가 되었습니다. 오사카의 인기 스타였던 침팬지 리타는 군복을 입고 깃발 달린 총을 메야 했습니다. 동물원의 철책과 벤치, 동물 이름표까지 전쟁에 바쳐졌습니다.

군복을 입은 리타. 오사카 시립 동물원, 1938년

동물들은 어떻게 죽었나

우에노 동물원은 1943년 8월 17일부터 9월 23일까지 14종 27마리의 동물을 죽였지만, 독은 거의 듣지 않았습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총이 금지되자, 직원들은 이토가 말하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동물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약물을 다룰 수 있는 면허를 가진 직원은 한 사람뿐이었고, 사육사들은 이런 방식으로 동물을 죽여 본 적이 없었습니다. 8월 16일, 배고픈 동물이 독이 든 먹이를 먹도록 대상 동물들에게 먹이를 끊었습니다. 독이 듣지 않으면 목을 조르고, 그래도 안 되면 창으로 찌르기로 했습니다.

첫 일주일

8월 17일 저녁, 사육사는 다카마쓰노미야가 기증한 암컷 불곰에게 질산스트리크닌 3그램을 섞은 찐 고구마를 주었습니다. 곰은 바로 먹었고, 1분도 안 되어 경련을 일으키더니 22분 동안 몸부림치다 죽었습니다.

다음 날 직원들은 암사자 한 마리와 반달가슴곰(조선 반달곰), 그리고 '핫코'라는 이름의 어린 표범을 죽였습니다. 핫코는 한 육군 상사가 중국 전선에서 새끼일 때 발견해 부대 마스코트로 키우다가, 동물원이 더 안전하리라 여겨 우에노로 보낸 표범이었습니다. 핫코는 두 살 반이었습니다. 9월, 그 상사는 전선에서 전화를 걸어 표범이 잘 지내느냐고 물었습니다.

날짜(1943년)동물실제로 일어난 일
8월 13일존(아시아코끼리)먹이와 물을 끊음. 17일째인 8월 29일에 죽음
8월 17일암컷 불곰, 수컷 반달가슴곰스트리크닌. 곰이 죽기까지 22분이 걸림
8월 18일암사자, 조선 반달곰, 표범 핫코독살. 사체는 박제되거나 가죽이 벗겨짐
8월 19일수컷 불곰독이 듣지 않아 막대 끝에 단 메스로 찔렀고, 1시간 반 뒤에 죽음
8월 20~21일어린 조선 반달곰, 늙은 반달가슴곰어린 곰은 독을 먹은 뒤 창에 찔림. 늙은 곰은 다섯 남자와 약 45분간 싸운 끝에 목이 졸려 죽음
8월 22일사자 알리와 카테리나, 호랑이, 치타알리는 32분 만에 죽음. 카테리나는 고기를 토해 냈고, 1시간 37분 뒤 창으로 심장을 찔림
8월 24일암컷 북극곰교살. 목에 철사 올가미를 거는 데 30분이 걸림
8월 26일방울뱀찔린 뒤 철사로 졸렸고, 16시간 뒤에 죽음
8월 27일비단뱀, 표범 두 마리, 말레이곰비단뱀은 목이 졸린 뒤 머리가 잘림. 표범 두 마리는 교살되었으나 기록에는 독살로 적힘
8월 29일수컷 북극곰, 아메리카들소북극곰은 사육사 다섯 명에게 목이 졸려 죽음. 들소는 교살된 뒤 도끼와 망치로 맞음
9월 1일어린 아메리카들소망치로 맞음

사자 알리와 카테리나는 1931년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쇼와 천황에게 보낸 선물로, 에티오피아 근위병이 항구까지 호위해 왔습니다. 들소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샌시미언 저택에서 왔으며, 태평양을 건넌 최초의 들소라고 합니다.

동물원이 장관에게 보고한 내용

후쿠다가 오다치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거의 모든 죽음이 독살로 적혀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독살 대부분이 실패했고, 후쿠다는 1968년에야 자신의 책에서 진실을 밝혔습니다. 사육사들은 폐원 후 저녁에 동물을 죽였고, 8월 더위에 사체를 보관할 수 없어 다음 날 아침 손수레에 실어 세타가야의 육군 수의학교로 보내 해부하게 했습니다. 일부는 박제되었고, 많은 동물이 가죽이 벗겨졌습니다.

8월 28일, 후쿠다는 코끼리 가죽을 벗기기 위해 무두질제 140파운드와 생석회 190갤런을 준비했습니다. 이 작업에는 약 한 달이 걸렸습니다. 동물원은 맹수사에 '공사로 인해 임시 폐쇄'라는 팻말을 걸었습니다. 도쿄도가 처분을 발표한 것은 8월 30일이 되어서였습니다.

박제된 사자가 나중에 원래 우리에 다시 놓였을 때, 그것은 마치 봉제 인형 같았다고 이토는 씁니다. 빈 우리에는 염소와 돼지가 들어갔습니다.

코끼리들

우에노의 코끼리 세 마리는 독살도 교살도 되지 않았고 다른 어떤 방법도 듣지 않아, 17일에서 30일에 걸쳐 굶어 죽었습니다. 1940년대 초 일본의 동물원에는 약 20마리의 코끼리가 있었지만, 1949년 5월에는 전국에 두 마리만 남아 있었습니다.

방공 훈련에서 방독면을 쓴 단치. 고베 시립 동물원, 1938년

존

인도에서 온 수컷 존은 1924년 암컷 톤키와 함께 우에노에 왔습니다. 존에게는 폭력적인 과거가 있었습니다. 1931년, 가시 달린 코끼리 갈고리로 이마를 찌른 서커스 조련사 이시카와 다이지로를 죽인 것입니다. 존의 뒷다리는 밤에도 사슬에 묶여 있었습니다. 이토는 동물원이 먹이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존을 길들였다는 것, 그리고 한 사육사가 존의 배 밑에서 건초를 태운 일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후쿠다는 8월 11일 이전에 존의 처분 허가를 받아 두었습니다. 사육사들은 존이 좋아하는 단팥빵을 주었는데, 그중 일부에는 청산가리를 주입했지만 존은 독이 없는 것만 골라 먹었습니다. 말에게 쓰는 주사기 바늘은 존의 가죽에 부러졌고, 귀 뒤쪽에 꽂은 두 번째 바늘도 부러졌습니다. 약을 제공한 육군 수의학교 직원들도 포기했습니다.

8월 13일, 사육사들은 존에게 먹이와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17일째인 8월 29일, 존은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 뒤 도쿄도 공원과는 존이 살던 코끼리 우리를 공습 희생자를 위한 관 500개를 보관하는 곳으로 썼습니다.

톤키와 하나코

존과 함께 온 톤키는 동물원 최고의 인기 스타였고, 후쿠다가 가장 아끼던 코끼리였습니다. 하나코는 1935년 태국에서 왔습니다. 사육사 스가야 기이치로와 시부야 신키치는 두 암코끼리를 죽이는 데 반대했습니다. 스가야는 존의 처분에는 동의했지만, 이 두 마리만큼은 분명히 거부했습니다.

후쿠다는 톤키를 살리려 했습니다. 코끼리가 없던 센다이시 동물원이 8월 11일 톤키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수송일은 8월 23일로 정해졌습니다. 그날 이노시타는 후쿠다에게 오다치가 격노했다고 전했습니다. 후쿠다는 오사카와 나고야에도 편지를 썼지만, 동물을 옮기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습니다.

두 마리에게는 8월 25일부터 먹이가 끊겼습니다. 후쿠다가 코끼리 우리에 가자, 눈에 띄게 야윈 톤키가 바나나를 받을 줄 알고 뒷다리로 일어서서 재주를 부렸습니다. 기운이 빠지자 두 마리는 울타리에 기대어 선 채로 자기 시작했습니다. 코끼리는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을 알면 그렇게 합니다. 후쿠다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9월 7일 코끼리 우리를 닫았습니다.

스가야는 몰래 먹이를 조금씩 주었습니다. 1950년 스가야의 장례식에서 그의 딸은, 아버지가 가족 배급으로 받은 고구마를 어디론가 가져가곤 해서 혼자 드시는 줄 알았다고 회상했습니다. 그것은 코끼리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코는 18일째인 9월 11일, 톤키가 코로 쓰다듬어 주는 가운데 굶주림과 탈수로 죽었습니다. 톤키는 독이 든 고구마를 도로 던져 버렸고, 청산가리가 든 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톤키가 죽은 것은 30일째인 9월 23일이었습니다.

동물원은 코끼리 우리에 흑백 줄무늬 휘장을 걸었습니다. 상을 당한 것처럼 보이는 그 휘장은 코끼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노시타는 후쿠다에게 오다치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마들

우에노의 하마 두 마리, 마루와 그 어미 교코는 1943년의 처분 명단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 이후, 동물원은 먹이 부족을 이유로 두 마리도 처분하기로 했습니다. 사육사들은 3월 19일에 먹이를 끊고 수영장의 물을 뺐습니다. 마루는 먹이도 물도 없이 14일을 버티다 4월 1일에 죽었습니다. 교코는 37일을 견뎠고, 마침내 건초 한 트럭이 도착한 4월 24일에 죽었습니다. 이토는 이 하마들도 우에노가 의도적으로 처분한 동물로 셈하며, 그래서 우에노의 합계는 29마리가 됩니다.

사자사 앞에서 사격 연습을 하는 엽우회 회원들. 히가시야마 동물원, 1941년 10월

사육사, 아이들, 그리고 은폐

동물을 죽인 것은 그 동물을 돌봐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록을 보면 그 일이 그들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후쿠다는 명령을 받은 회의가 끝난 뒤 가랑비 속에 동물원을 걷자, 호랑이와 코끼리가 울타리로 다가와 몸을 비벼 댔다고 일지에 썼습니다. 그는 동물들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후쿠다는 직원들에게 명령을 전하며, 가족을 포함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후쿠다는 한 달 만에 몸무게가 16파운드(약 7킬로그램) 빠졌고, 몇 년 동안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자기가 맡은 동물이 죽는 날 결근한 사육사도 있었습니다. 스가야와 시부야는 사육 업무에서 빠져 관리인이 되었습니다. 존의 배 밑에서 건초를 태운 적이 있는 시부야는 코끼리 세 마리의 혼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톤키에게 밟히는 꿈을 계속 꾸었다고 합니다.

시부야는 또, 그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고 사육사들이 죽은 동물의 고기를 먹었다고 말했습니다. 들소와 코끼리, 하마는 맛이 형편없었고, 기름진 악어 고기가 가장 맛있었다고 합니다. 이토에 따르면 처분 이후 일부 노련한 사육사들은 술에 빠졌습니다. 1952년 우에노가 새 하마 한 쌍을 사들였을 때, 직원들은 축하 자리에 함께할 수 없었습니다.

침묵과 위령제

도쿄도는 8월 30일 27마리를 처분했다고 발표했는데, 거기에는 몰래 아직 살아 있던 세 마리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보도는 검열되었습니다. 8월 31일 동물원을 찾은 동물학자 다카시마 하루오는 '공사 중' 팻말과 함께 닫힌 우리를 보았고, 이틀 뒤에야 진상을 알았습니다. 그는 동물원의 동물들은 야생 동물만큼 위험하지 않으며 사람에게 거의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동물원에는 주로 아이들이 보낸 항의 편지가 쏟아졌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9월 4일, 오다치는 센소지의 주지를 초청해 동물원에서 위령제를 열었습니다. 내빈의 추도사는 동물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했습니다. 다카미야에 따르면 위령제를 제안한 것은 오다치 자신이었으며, 동물들에게 가엾은 일을 했으니 위령제를 지내자고 말했다고 합니다.

오사카의 아이들

오사카 시립 동물원은 기자들에게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데라우치 신조 원장은 9월 초 언론에 동물이 "가까운 시일 안에" 처분될 것이라고 말했고, 바로 다음 날 처분을 시작했습니다. 보도가 나간 뒤 원장과 시장 앞으로 동물을 소개시켜 달라고 비는 아이들의 편지 등이 날아들었습니다. 선생님을 따라 마지막으로 동물들을 보러 갔던 2학년 남자아이는 자기 용돈을 동봉하며, 죽기 전에 동물들에게 맛있는 것을 먹여 달라고 썼습니다. 5학년 여자아이는 다시는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동물들이 초식동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기도와 함께 돈을 보냈습니다.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의 우에다 기자는 검열이 삼엄하던 1944년 2월, 질문을 던지는 형식으로 이 정책을 비판했습니다. 뿔 달린 사슴이나 들소도 사자만큼 피해를 줄 수 있고, 조심성 많은 대형 고양잇과 동물은 비상시에 우리 안쪽으로 숨을 것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또 처분 이후 사육사들이 풀이 죽어 점심도 먹지 못했다고 썼습니다.

맞선 원장들

몇몇 원장은 살릴 수 있는 것을 살리려 했습니다. 톤키와 표범 한 쌍, 흑표범 새끼를 소개시키려던 후쿠다의 시도는 모두 실패했습니다. 오랫동안 오사카 원장을 지낸 하야시 사이치는 1943년 1월 조기 퇴직했는데, 앞으로 일어날 일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 아니냐고 짐작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교토 원장은, 뒤에서 보듯이, 콘크리트 침실이 있으니 탈출할 일은 거의 없다고 경찰에 주장했습니다. 나고야의 기타오 에이이치 원장은 1944년 12월까지 버텼습니다. 그래도 끝내 거부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1945년 3월 19일부터 먹이와 물을 끊긴 교코와 마루(각각 4월 24일과 4월 1일에 죽음). 우에노 동물원, 1945년 3월

전국으로 퍼진 정책

우에노 이후 16개월 안에 일본동물원협회 회원 동물원은 한 곳의 예외 가능성을 빼고 모두 맹수를 처분했고, 서커스에도 같은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토는 확인된 것만 동물원에서 최소 170마리, 서커스에서 133마리, 합쳐서 303마리의 동물이 죽었다고 집계하며, 실제 총수는 훨씬 많다고 봅니다.

동물원도시시작확인된 처분 수
우에노도쿄1943년 8월 17일29마리(1943년 27마리, 1945년 하마 2마리)
오사카 시립오사카1943년 9월 4일26마리(24마리라는 자료도 있음)
이노카시라도쿄1943년 9월6마리
이토즈 유원고쿠라1943년 9월최소 2마리
가모이케가고시마1943년 10월 6일15마리
구마모토시구마모토1944년 1월16마리(1944년 15마리, 1945년 코끼리 엘리)
다카라즈카다카라즈카1944년 3월 5일다수, 수 불명
센다이시센다이1944년 3월경12마리
교토시교토1944년 3월 13일14마리
후쿠오카시후쿠오카1944년 6월 6일최소 3마리, 그 밖에 수 불명
고베시고베1944년 7월24마리
리쓰린 공원다카마쓰1944년 말경최소 1마리, 그 밖에 수 불명
히가시야마나고야1944년 12월 13일15마리(그 이전에 3마리 더)
고후시고후불명기록이 서로 엇갈림

숫자는 이토가 각 동물원의 원사(園史), 시의 기록, 신문에서 모은 것입니다. 열다섯 번째 동물원인 오사카 근교의 한신 파크는 민영이었고 명령 전인 1943년 4월에 동물을 팔았기 때문에 표에 넣지 않았습니다. 조선, 대만, 만주국의 동물원 세 곳에서도 동물이 처분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관망

우에노 이후 원장들은 고베에 모였지만, 14명 중 6명만 참석했고 후쿠다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도시는 수도가 아니니 우에노처럼 되지는 않으리라 기대하며, 우리를 보강하고, 실감 나게 연막탄을 쓴 방공 훈련을 하고, 동물이 탈출할 일은 없다고 시민들을 안심시키기로 했습니다.

오사카

오사카 시립 동물원이 처분을 시작한 것은 9월 4일, 원장이 기자들에게 처분이 "가까운 시일 안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 다음 날이었습니다. 이토가 인용하는 작가 아키야마 마사미는 우에노가 받은 것 같은 최후통첩이 없었는데도 그토록 서두른 것을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동물원은 1943년 9월부터 1944년 3월까지 26마리를 처분했습니다. 대부분은 귀한 쇠고기에 독을 넣어 죽였고, 먹지 않은 표범은 목을 졸라 죽였습니다.

동물들은 동물원의 귀중한 재산이었고, 이토는 그 가격도 소개합니다. 월급이 100엔도 안 되던 시절, 북극곰 한 마리는 1,500엔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동물원은 암컷 북극곰을 1944년 3월까지 살려 두었습니다. 데라우치 원장은 첫 처분까지 며칠 사이에 몸무게가 11파운드(약 5킬로그램) 빠졌습니다.

교토

교토는 콘크리트 침실이 튼튼하고 시가 공습을 받으리라고도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처분을 면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라 원장은 경찰에 아무것도 죽일 필요가 없다고 했고, 1943년 4월과 5월에는 한신 파크에서 암코끼리와 기린을 사들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1944년 3월 12일, 한 육군 참모장이 훈련차 예고 없이 찾아와 오후 3시에 즉시 맹수를 처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라 원장은 하루만 유예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다음 날 직원들은 참모장과 경찰, 시 직원들 앞에서 불곰과 그 어미를 쏘았습니다. 12분 뒤, 아들 곰이 다시 일어섰습니다. 확인하지 않은 직원들은 두 마리를 그대로 밤새 내버려 두었고, 다음 날 아침 아직 살아 있던 두 마리는 와이어로프로 목이 졸려 죽었습니다. 3월 13일부터 25일까지 14마리가 죽었습니다.

나고야

가장 오래 버틴 사람은 히가시야마 동물원의 기타오 에이이치 원장이었습니다. 1943년 11월, 동물원은 '실험'으로 에조 불곰을 독살하고 사자를 교살했습니다. 기타오는 사자 두 마리를 중국 장자커우에 기증하는 데 성공했고, 사자 한 마리는 사격 연습용으로 지역 엽우회에 팔렸습니다.

1944년 12월 13일, B-29가 나고야를 폭격했습니다. 엽우회 의용대원 약 50명이 지쿠사 경찰서에 모여 내무성의 명령을 기다렸습니다. 명령은 도시가 불타는 와중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동물원에서 기타오를 둘러쌌습니다. 기타오는 눈물을 흘리며 "하십시오"라고 말하고 원장실에 틀어박혔습니다. 사냥꾼들은 45분 동안 표범 두 마리, 호랑이 한 마리, 사자 네 마리를 쏘았습니다. 이것이 일본의 마지막 사자였고, 1949년까지 일본에는 사자가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며칠 뒤 사냥꾼들은 곰을 잡으러 다시 왔습니다. 이번에는 억지로 함께 가게 된 기타오가, 가슴의 흰 초승달 무늬를 겨눌 수 있도록 반달가슴곰을 꾀어 뒷다리로 서게 했습니다. 곰은 먹이를 줄 줄 알고 일어섰습니다. 그날 여덟 마리의 곰이 모두 총에 맞았습니다. 기타오는 몇 년 동안 그 꿈을 꾸었습니다.

이어 사냥꾼들이 코끼리 네 마리를 요구하자, 기타오는 거의 매일 육군 사령부와 경찰서를 찾아가 코끼리는 길들여져 있다고 호소하고, 사슬로 묶어 두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죽이려면 먼저 자기를 죽이라는 취지의 말도 했습니다. 당국은 더 이상 명령하지 않았고, 네 마리 중 두 마리가 전쟁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센다이와 서커스

센다이시 동물원은 적자였고, 시는 농장으로 바꾸는 것까지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비판이 커지는 가운데 1944년 봄에 12마리의 동물을 처분했습니다.

서커스에 주어진 기한은 일주일이었습니다. 1943년 10월 21일, 경시청은 28개 서커스단에 10월 28일 오전 10시까지 맹수를 처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독이나 총으로 133마리가 죽었습니다. 사자 52마리, 표범 8마리, 호랑이 2마리, 곰 6마리, 코끼리 7마리, 뱀 58마리였습니다. 동물은 서커스의 생계였고, 마치 팔다리를 잘린 것 같았다고 이토는 씁니다.

후쿠오카와 규슈

히가시 공원에 있던 후쿠오카 동물원이 텅 빈 것은 우에노보다 아홉 달 뒤였고, 가장 기록이 적은 동물원 중 하나입니다. 이 주제에 관한 일본어의 주요 연구인 아키야마 마사미의 1995년 책은 규슈를 전혀 다루지 않으며, 그래서 후쿠오카의 이야기는 어느 언어로도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고 이토는 지적합니다.

날짜사건
1928년 11월쇼와 천황 즉위 기념사업 위원회가 설치되고, 동식물원 건설이 계획됨
1932년 3월히가시 공원이 건설 부지로 결정됨
1932년 9월 28일히가시 공원에서 기공식
1933년 8월 20일동물원 개원
1934년 4월 11일시장과 의장이 참석한 가운데 개원식이 열림
1944년 5월 20일동물원 폐원
1944년 6월 6일대형 동물이 처분됨
1944년 6월 7일위령제가 열림
1945년 6월 19일미군 공습으로 후쿠오카 중심부가 불탐
1949~1950년시의회가 새 동물원 건설을 승인하고 미나미 공원을 부지로 선정
1953년 8월 22일미나미 공원에 새 동물원(현재의 후쿠오카시 동물원) 개원

출처: 후쿠오카시 동물원 연혁, 후쿠오카시의회사 제3권, 이토.

동물원 건설

시의회 자체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동물원은 1928년 처음 제안된 뒤 개원까지 5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모금, 현으로부터 히가시 공원 부지를 빌리는 일, 지역의 찬반, 부지 재검토 등이 지연의 원인이었고, 공원 안의 나무를 베는 일도 공사를 늦췄습니다. 비용의 상당 부분은 시민들이 부담했고, 옛 동물원에 관한 도서관 전시는 도쿄 같은 대도시의 동물원에 버금가는 곳이었다고 소개합니다.

동물원에 있던 것

동물원 자체의 연혁 페이지에 따르면 부지는 5,096평, 총공사비는 15만 엔이었습니다. 동물사는 38동, 식물은 100종이 넘었습니다. 개원 당시에는 65종 164마리의 포유류와 124종 500마리의 조류 외에 파충류, 양서류, 어류가 있었습니다. 첫날에는 약 5,000명이 찾았고, 첫해에는 134일의 개원일 동안 약 15만 명이 방문했습니다. 입장료는 어른 15전, 어린이 10전, 군복 차림의 군인은 10전이었습니다.

이토는 사자와 코끼리 외에 당시 일본 동물원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바다사자와 물개를 포함해 사육 동물이 약 700마리였다고 씁니다. 정문은 함부르크의 하겐베크 동물원을 본뜬 것으로, 양쪽 기둥에서 코끼리 코가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바다사자 연못의 육각형 정자가 지금 오호리 공원에 있는 우키미도입니다.

폐원과 처분

도서관 전시에 따르면, 동물원은 먹이를 구하기 어려워지고 공습으로 동물사가 부서질 우려도 있어 1944년 5월 20일 문을 닫았습니다. 6월 6일 대형 동물이 처분되었고, 다음 날 죽은 동물들을 위한 위령제가 열렸습니다.

기록에 남은 것은 대체로 이것이 전부입니다. 동물원의 공식 50년사에는 "사자, 호랑이, 하마 등을 처분"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 총수도 목록도 방법도 없으며, 이토의 표도 '3마리+다수'라고밖에 쓰지 못합니다. 이토는 또 동물원 자체 웹사이트에 최소 세 마리의 코끼리가 찍힌 1933년 사진이 실려 있는데도 그 코끼리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한 자료가 없다고 지적합니다. 바다사자와 물개에 대해서도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구마모토에서는 바다표범과 바다사자가 굶어 죽었으니 여기서도 같은 일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제가 찾아본 바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1945년 6월 19일, 미군 공습으로 후쿠오카 중심부는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전후 아이들과 시민들은 동물원이 다시 열리기를 계속 바랐습니다. 시의회는 1949년 시제 60주년 기념사업으로 동물원 건설을 만장일치로 의결했고, 이듬해 미나미 공원을 부지로 정했습니다. 1951년 4월 시장이 된 고니시 하루오는 지역 재계에 협력을 구하고 우에노 동물원장의 조언도 받았습니다. 1952년 11월까지 2,800만 엔의 기부금이 모였고, 새 동물원은 1953년 8월 22일 69종 143마리의 동물과 함께 문을 열었습니다. 그때까지 니시니혼 신문 후생사업단은 기다리는 아이들을 위해 다마야 백화점 옥상에 작은 동물원을 열었습니다.

규슈의 다른 동물원

이토즈 유원(고쿠라). 철도 회사가 운영하던 이 동물원은 현 경찰 부대의 본부로 쓰기 위해 1944년 1월 10일에 문을 닫았습니다. 전시 원장이었던 아난 데쓰로는 이 이야기를 두 번 했는데, 그 내용이 바뀌었습니다. 1950년에는 직원이 일본도로 하이에나를 찔렀고, 서커스에 넘긴 코끼리는 조선에서 처분되었다고 했습니다. 1975년에는 하이에나가 부상으로 죽었을 뿐이고, 코끼리는 공연 중에 죽은 것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또 동물원이 곰을 독살했고 마지막 수사자는 자연사했다고 썼는데, 이토는 이를 사자도 어차피 처분되었으리라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녀는 이야기가 바뀐 것이 회한 때문일지 모른다고 짐작하며,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모이케(가고시마). 동물원은 1943년 10월 6일부터 31일까지 사자 2마리, 곰 7마리, 악어 4마리, 비단뱀 2마리를 포함해 15마리를 죽였습니다. 동물들이 무언가를 눈치채고 먹이를 거부해 스트리크닌이 듣지 않자, 직원들은 가까운 노면전차 선로에서 고압 전류를 끌어와 전차가 다니기 전 이른 아침에 감전사시켰습니다. 사육사들은 차마 악어를 죽일 수 없어 손수레에 실어 살리려 했지만, 한 마리가 달아나 거리에서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11월 6일에는 위령제가 열렸습니다.

구마모토. 1943년 12월 육군의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하야시 로쿠로 원장은 다른 동물원들이 쓴 독이나 총 대신 전기로 처분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첫 호랑이 때 사육사는 전선을 연결한 대나무 장대 끝에 고기를 달아 내밀었습니다. 호랑이가 온화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견디지 못하고 달아났고, 호랑이가 고기에 달려든 순간 스위치가 켜졌습니다. 1944년 동안 죽은 동물은 호랑이 3마리, 사자 2마리, 반달가슴곰 2마리, 그 밖의 곰 3마리, 표범 2마리, 늑대 3마리 등 15마리였습니다. 원장은 비단뱀과 하마, 코끼리 엘리는 맹수가 아니라고 주장해 살려 냈습니다.

그것은 미루는 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1945년 1월 7일 하야시 원장이 소집되었고, 같은 날 하마가 굶어 죽었습니다. 바다사자와 물개는 굶어 죽고 비단뱀은 추위로 죽었으며, 동물원은 3월 31일 문을 닫았습니다. 4월, 육군은 새 원장에게 당시 열 살이던 엘리를 데려가겠다고 알렸고, 병사들의 식량으로 삼기 위해 엘리를 죽이기로 했습니다. 아마 5월 중순의 일입니다. 전기가 흐르는 수조에 들어가기를 엘리가 거부하자, 전선을 연결한 막대 끝에 고구마를 달아 먹였습니다. 엘리의 몸은 수조 안에서 해체되었고, 물은 오랫동안 붉게 물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엘리를 딸처럼 아끼던 사육사 가나자와 다로는 이후 엘리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1,600마리였던 동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직원도 세 명뿐이었습니다.

꼭 필요했을까?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처분은 시민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토의 평가이며, 이후의 공습이 이를 증명했습니다. 일본 어디에서도 공습으로 부서진 우리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 우에노는 1945년 3월의 도쿄 대공습을 무사히 넘겼습니다. 동물원이 입은 유일한 피해는 1945년 4월 13일, 코끼리 우리가 안에 보관하던 관 500개와 함께 불탄 일이었습니다. 맹수사는 멀쩡했습니다.
  • 오사카는 1945년 3월 13~14일에 약 2,000발의 소이탄을 맞았습니다. 시설 17곳이 불타고 새 33마리가 죽었지만, 맹수사는 한 곳도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 교토는 큰 공습을 한 번도 받지 않았습니다.
  • 나고야에서는 1944년 12월 13일에도, 동물원이 폭격을 맞은 1945년 2월 15일에도 맹수사에 피해가 없었습니다. 탈출한 것은 방사장에 있던 들소 한 마리뿐이었고, 곧 사살되었습니다.

공습 중에 우리를 빠져나온 맹수는 한 마리도 없었다, 왜냐하면 동물이 이미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것이 이토의 정리입니다. 교토의 하라 원장이나 나고야의 기타오 원장 같은 원장들은, 보강한 우리는 버틸 것이고 폭탄이 우리에 떨어지면 안의 동물도 죽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오사카 마이니치의 기자는 겁먹은 대형 고양잇과 동물은 덤벼들기보다 숨는다고 지적했습니다. 1936년 우에노에서 탈출한 흑표범도 숨어만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다른 나라의 동물원도 전쟁 중에 동물을 죽였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 런던 동물원은 런던 대공습 1년 전인 1939년 9월에 동물 처분을 시작했지만, 영국은 이미 전쟁 중이었고 결정은 동물원 스스로 내린 것이었습니다.
  • 벨파스트 동물원은 1941년 4월 공습 때 동물을 처분했습니다.
  • 베를린 동물원과 함부르크의 하겐베크 동물원은 공격을 받은 뒤에 동물을 처분했습니다.
  • 브롱크스 동물원과 필라델피아 동물원 같은 미국 동물원은 비상 계획을 세웠지만, 결정은 동물원이나 운영 단체에 맡겨졌습니다.

이토는 전국 규모의 조직적인 정책을 시행한 나라는 없었고, 예상되는 공습보다 그렇게 앞서 동물을 죽인 유럽 동물원도 없었다고 봅니다. 독일과 네덜란드의 일부 동물원은 군의 명령에 따랐을지 모르지만, 전국적으로 일률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는 일본의 사례를 이례적이고 특이한 것이라고 부릅니다.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이토는 동물 처분을 시민을 동원하기 위한 오다치의 정책 가운데 첫 번째로 읽습니다. 1944년 오다치는 도쿄의 학동 소개와, 방화대를 만들기 위한 건물 소개를 추진했고, 내무성과 군은 두 정책을 전국으로 넓혔습니다. 처분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었는지에 대해 그녀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평가로는 시민의 안전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뒤

명령을 내린 사람은 재판을 받지 않았고, 동물들의 일이 청산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의 대부분은 수십 년 뒤에, 그것도 조각조각 드러난 것입니다.

오다치

오다치는 1944년 7월 내무대신이 되었고 1945년 4월에 사임했습니다. 점령 당국은 그를 전범 용의자로 구금하라고 명령했고, 그는 1945년 12월 16일 스가모 형무소에 들어갔습니다. 1947년 8월 31일 재판 없이 풀려났는데, 큰 이유는 고노에 총리가 만든 전시 일국일당 조직 대정익찬회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946년에 공직에서 추방되었다가 1952년에 해제되었습니다.

1953년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문부대신에 임명되었고, 1954년에는 교원의 정치 활동을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1955년 9월, 위암으로 63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옥중 일기에는 동물에 관한 이야기가 한마디도 없습니다.

진실이 드러나기까지

후쿠다가 우에노의 진짜 이야기를 밝힌 것은 사반세기 뒤인 1968년이었습니다. 이토즈 유원의 아난은 1950년과 1975년에 서로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많은 동물원의 원사에는 날짜도 숫자도 없고, 서로 엇갈립니다. 2008년 이토가 나고야 동물원의 간부 직원에게 전시 기록에 대해 묻자, 기록은 없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시 직원들이 몇 년마다 동물원 부서를 옮겨 다니고, 실제로 처분에 관여한 사람들 대부분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적습니다.

전후 정부는 전시의 지나친 일들의 책임을 군에 떠넘기기도 했지만, 고모리는 동물원 처분에 대해서는 군의 명령이 없었다고 강조합니다.

위령

대부분의 동물원은 전시에 위령제를 열고 불교 관습에 따라 위령비를 세웠습니다. 이토는 그것이 주로 처분에 관여한 사람들의 죄책감을 덜어 주는 것이었을 뿐 동물들에게는 거의 의미가 없었다고 보며, 교토의 수의사 다키자와도 위령제를 위선적이라고 느꼈다고 소개합니다.

엘도와 마카니, 그리고 코끼리 열차

전쟁이 끝났을 때 남은 코끼리는 몇 마리뿐이었고, 1949년 5월에는 나고야 히가시야마 동물원의 엘도와 마카니가 일본에 남은 단 두 마리의 코끼리였습니다. 그달, 다이토구 어린이 의회를 대표하는 도쿄의 아이 두 명이 나고야를 찾아와 우에노 동물원에 한 마리를 빌려 달라고 기타오에게 부탁했습니다. 기타오는 아이들을 코끼리 우리로 데려가 두 마리를 철문으로 갈라놓고 보여 주었습니다. 마카니는 이마에서 피가 날 때까지 문에 몸을 부딪쳤습니다. 기타오는 그만큼 두 마리가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며 거절했습니다.

그 대신 기타오는 아이들이 코끼리를 보러 와 달라고 했습니다. 일본의 철도를 관리하던 점령 당국은 임시 열차를 허가하지 않았고, 철도 직원들이 몇 번이고 부탁한 끝에 겨우 허가가 났습니다. 첫 '코끼리 열차'는 1949년 6월 18일 약 1,400명의 아이를 태우고 히코네를 출발했고, 6월 26일에는 약 1,150명을 태운 열차가 우에노를 떠났습니다. 코끼리 열차는 아직 불탄 흔적이 남은 도시들을 지나, 모두 1만 5천 명의 아이들을 나고야로 실어 날랐습니다.

마카니는 1963년 9월 추정 약 66세로 죽었고, 엘도도 그해 10월 추정 약 58세로 뒤따랐습니다. 동물원은 해마다 동물 애호 주간에 두 마리를 위한 위령제를 열며, 원내에는 위령비가 서 있습니다.

후쿠오카에 남아 있는 것

  • 오호리 공원의 우키미도는 히가시 공원 동물원의 바다사자 연못에서 남은 건물입니다.
  • 시립 도서관에 따르면 코끼리 문기둥은 마이다시 초등학교 교정 한쪽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수업 중인 학교이니 방문 전에 미리 확인해 주세요.
  • 1953년에 문을 연 미나미 공원의 후쿠오카시 동물원이 히가시 공원 동물원의 뒤를 이었습니다.
옛 후쿠오카시 동식물원 정문

아직 모르는 것

풀리지 않은 의문의 상당수는 후쿠오카 자체에 관한 것이며, 기본적인 날짜조차 자료마다 다릅니다.

  • 후쿠오카 동물원이 처분한 동물의 수, 그 종류와 방법. 동물원의 50년사가 꼽는 것은 사자, 호랑이, 하마 '등'뿐입니다.
  • 동물원의 1933년 사진에 찍힌 코끼리들의 행방, 그리고 바다사자와 물개의 행방.
  • 정자가 옮겨진 것은 언제인가. 오호리 공원 공식 사이트와 시 문화재 책자는 1949년이라고 하지만, 시립 도서관 전시는 1974년이라고 합니다. 연못에 있던 것이 물개였는지 바다사자였는지도 자료마다 다릅니다.
  • 동물원이 문을 연 것은 언제인가. 시의회사와 동물원 자체의 페이지는 1933년 8월 20일, 개원식은 1934년 4월 11일이라고 합니다. 이토는 1933년 6월이라고 씁니다. 새 동물원의 개원도 이토는 1953년 6월이라고 하지만, 동물원 자체의 페이지는 8월 22일이라고 합니다.
  • 후쿠오카에 동물 위령비가 있는가. 저는 찾지 못했습니다.
  • 오다치 자신의 생각. 오다치는 이 일에 관해 아무것도 써 남기지 않았고, 조호르 동물원과의 연관은 이토의 추론일 뿐 기록된 사실이 아닙니다.

더 알아보려면

  • 『후쿠오카시의회사』 제3권. 동물원에 관한 장이 온라인에 공개되어 있으며, 동물원의 설립과 그 발자취를 다룹니다.
  • 동물원의 50년사 『후쿠오카시 동물원 50주년 기념지』(2003). 이토가 1944년 처분의 근거로 삼은 자료입니다.
  • 이토가 인용하는, 옛 동물원 정문 터에 관한 2007년 5월 22일 아사히 신문 기사.
  • 『후쿠오카 근대 두루마리』(후쿠오카시 박물관, 2009). 시 문화재 책자에 실린 히가시 공원 동물원 사진의 출처입니다.
  • 후쿠오카시 종합도서관이 소장한 동물원의 옛 그림엽서.

출처

주요 출처: Mayumi Itoh(이토 마유미), 『Japanese Wartime Zoo Policy: The Silent Victims of World War II』(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0), DOI 10.1057/9780230117440. 전국에 관한 서술은 제1~6장, 제9~10장과 권말 연표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인용문과 사육사들의 증언 중 다수는 이토가 인용하는 원장과 사육사 자신의 저술에서 나온 것이며, 여기에는 후쿠다 사부로의 『실록 우에노 동물원』(1968)도 포함됩니다.

후쿠오카에 관한 출처:

더 읽을거리: Frederick S. Litten, 「Starving the Elephants: The Slaughter of Animals in Wartime Tokyo's Ueno Zoo」, The Asia-Pacific Journal(무료 열람 가능); 아키야마 마사미, 『동물원의 쇼와사』(1995).

숫자와 날짜는 2026년 10월 기준 위 자료들에 바탕을 두었습니다. 자료마다 다른 경우에는 본문에 그 점을 밝혀 두었습니다.